구미시와 안동대학교 김희곤교수 등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왕산 허위 선생의 의병 활동에 관한 약사에 대해서 허위선생을 오래전부터 희미하게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특별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야 대단한 분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분의 위업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 로터리까지의 큰 도로를 왕산로라 부르기도 하구요. 구미시에는 왕산초등학교, 왕산기념관 왕산로 등 여러 이름으로 허위선생을 구미시 최고의 구국충정의 큰 인물로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왕산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짧은 글로 다 적을 수는 없으니 허위 선생의 약사(略史)가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책 전체를 여기에 옮길 수는 없으니 김천시와 관계된 부분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간략하게 적어보면...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운동으로 인해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이 일어났었지요.
그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8월에는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있었고, 11월에는 단발령까지 내려졌었지요. 이에 격분한 팔도의 유림들이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을 일으켰구요.
김천지역에서도 허위선생의 활동 또한 대단했지만, 의병 활동에 같이 동참했던 김천분들의 글하고 다소 차이가 있어서 두분의 글을 같이 올려 보겠습니다.
(김천시 남산공원에 있는 남은(南隱) 여중룡선생의 순충기념비) |
먼저 여중룡의 『남은유집(南隱遺集)』 에 의거해 ‘김산장의군’의 창의와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95년에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상주·선산·김산·성주에서는 창의가 없었다. 이를 애통히 여긴 여중룡이 같은 해 12월에 족질 여영조와 상의하여 김산군 북부[김산향교 관내] 각 동에 통문을 보내 김산향교에 모일 것을 촉구하였으나 지사들이 향교에 모이지 않았다.
이듬해 1월 다시 각 읍에 통문을 보내 김산향교에 모일 것을 촉구하여 1월 22일 향교에서 관민의 추앙을 받는 정운채를 의병군의 통수자로 추거하기로 하고 그 의향을 묻기로 했다. 이때 유도섭이 찾아와 조동석·이기찬·허위·강심형·양재안·이가하 등이 상주에서 창의하려고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했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지금 김천에 유숙하면서 40~50명의 포정을 확보하고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개령의 허위경과 함께 김산 무기고에서 무기를 거두어 황간으로 나아가 군기를 세워 진을 치면 영동·옥천에서도 동참하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같이 협력하여 거사하자고 하였다.
여중룡은 그들이 군자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개령과 선산에서 온다던 포수도 오지 않아 거사를 못할 것을 염려하여 주저하다가 결국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어 의병장을 이기찬으로 하여 조직을 갖추었으며 이기찬은 단에 올라 서차와 행군 규칙을 설명하고 ‘김산장의대장’이라고 크게 쓴 대장기를 세웠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향교에서 창군한 의병군은 읍내에 있는 장교청으로 이진하고 장병은 각 관청에 분산 숙식했다. 군비는 김산군의 세무관으로 있던 여영근이 2,000량을 마련해 우선 충당하고 김산군의 하리 백채기를 설유하여 김산군 무기고에서 군기를 거두어 김천역으로 이진하였다. 오후에는 노곡[농소면]으로 다시 옮겼다가 해질 무렵 지례로 행군하여 그곳에 투숙하였다.
이른 아침 사방 문에 참군 응모를 호소하는 격문을 붙이고 지례현감 이주필을 수방장으로 추거했으나 불응하였다. 대신 관 포군을 의병군에 보내니 모군에 응하는 자가 많아져 군세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운량도감이 군량 조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의병들이 굶주리기도 했다.
이어 관찰사 이중하가 보낸 관병 수백 명이 지금 김천에 와 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지례에 당도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자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대적할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고 흩어졌다. 십 수일 후에 김산장의군은 재거의 뜻을 갖고 황간에서 다시 모집하여 구성으로 이진한 후 곧바로 홍심동[부항면 대야리]으로 군진을 옮겨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대구 관군이 의병군을 공격하려고 구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제 공격을 위해 중군 양제안이 100여 명을 이끌고 봉곡 조룡[대덕면]을 거쳐 야반에 관군이 있는 구성에 도착하였다.
의병장 이기찬도 수백 명의 군병을 배불리 먹이고 구성을 향했고 야반에 희곡[부항면]에 당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구 관군의 선봉대가 일제히 발포하였고 의병군도 응사하면서 혼전이 벌어졌으나 수가 많은 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군병을 수습하여 산곡으로 후퇴하면서 태반이 도주하였고, 수십 명만 남아 홍심동에 돌아오니 진을 지키고 있던 이주필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니 집에 돌아가 신주를 묻고 피신하자고 했다.
남은 의병들은 호서의 여러 군진에 합세하였다. 한편 허위는 황간에서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아 진천에서 거사하려고 떠났다가 왕명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남은유집』에 나오는 내용과는 다르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김천·성주 등지에서는 허위· 이기찬· 이은찬· 조동호·이기하 등의 의거가 있었다. 우국 강개의 뜻을 품은 허위 등은 각처에서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봉기 활동이 있음을 보고 거사를 결의하다.
1896년 김천 장날을 기해 김천읍으로 들어가서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한데 이어 무기고를 차지하여 무기와 군수품 등을 손에 넣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김산장의군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산·성주 두 곳에 군사를 나누어 진을 치고 서로 호응하여 대구부로 진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대구부 관군이 급히 출동하여 먼저 성주진을 습격하고 공주의 관군과 연합하여 대공세를 펴자 두 진이 무너졌으며 이기찬 등 일부 장령은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호동이란 분이 깔끔하게 정리를 한 내용입니다.
위의 책에는 허위 선생이 김산의진 의병활동을 하며 거쳐간 김천의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직지사, 지례장터, 구성면 마산리 장자동 그리고 부항면의 홍심동(紅心洞)까지... 부항면 갈불마을에서 대야리로 가다가 왼쪽 산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다 보면 홍심동이 있었다네요.
깊은 골짜기에 몇가구가 살았던 마을이라고 하는데 구한말 이곳에 살았던 이용강(李龍岡) 또는 이용직)이 경상도관찰사를 파직당하고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항일독립군 김산장 의군(金山杖 義軍) 이 이곳에 주둔했을때 군량미 80석을 순순히 내놓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폐동되어 대야리로 흡수가 되었다네요.
그후 고종의 밀명으로 허위가 이끌던 의병군은 아쉽게도 해산을 하게 됩니다.
책을 전부 옮길수는 없으니 간략하게 줄입니다.
그 후 왕산은 종2품 의정부 참찬이라는 관직에 오릅니다. 또 경기 의병의 총수로 떠오르기도 하지요. 허위는 마전·적성 등지에 머물며 가평 일대에 활약하던 이인영과 연락을 합니다.
의병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확산됩니다.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이 조직되었지요. 허위와 이인영 두 부대가 주축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일제 통감부가 설치된 서울로 진군하자는 격문을 발송합니다.
전국 의병들이 양주로 속속 집결했구요. 허위 의병부대 2000여 명 등 48진 1만여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허위는 군사장을 맡았답니다.
1908년 1월말에 서울진공작전이 개시됩니다. 허위는 부대별로 동대문 밖에 집결시킨 뒤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직접 진격했습니다. 동대문이 30리 남았을때 유고(有故)가 생깁니다. 후발 본대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했답니다.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지휘권을 허위에게 넘기고 급거 귀향을 합니다.
의병은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지만 정보는 사전 누설되고 화력과 병력은 절대 열세였지요. 서울 진공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항일 의병사에서 유일한 대규모 작전이었는데...서울진공작전의 길은 지금 왕산로(청량리∼동대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네요.
허위는 서울침공작전이 실패한 이후에도 임진강·한탄강 유역으로 물러나 항전을 계속합니다. 전투는 5월까지 이어졌구요. 왕산은 부하를 서울로 잠입시켜 ‘통감부를 철거하라’ ‘태황제(고종)를 복위시키라’ 등 30여 가지 조건을 통감부에 제시하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싸울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해 6월에 큰 변고가 생깁니다.
포천에 머물던 허위는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 헌병에게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바로 서울로 압송됩니다. 일제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게 누구며 대장은 누구냐”고 묻자 왕산 허위는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伊藤博文)요 대장은 바로 나”라고 답했다지요.
재판관이 이유를 묻자 왕산은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병을 일으킨 게 이토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허위는 9월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순국 1호였습니다. 그때 허위의 나이는 겨우 54세였습니다.
허위는 사형된 뒤 야산에 버려졌습니다. 제자 박상진이 스승 허위의 시신을 간신히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구요.
왕산 선생의 묘는 당초 김천시 남면 부상리 영취산 자락에 있었다고 합니다. 남면 사무소에서 벌초까지 했었다는데 2012년 6월에 구미시 왕산기념관 옆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장 전의 묘지 확인 차 산행 |
허위선생이 제일 처음 의병활동을 했던 곳도 김천이고 묘소까지 김천 남면에 있었다는데, 정작 김천시 어디에서도 그분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참여자치 김천시민연대" 회원 몇 분이서 허위 선생이 사형을 당하시고 처음 묻혔다는 남면 부상리 영취산 자락을 두시간이나 찾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허물어진 묘지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너무 아쉬웠지만 산을 내려오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왕산 허위선생이 거쳐간 고난의 길을
"의병의 길"이라 이름 짓고 직접 찾아가면서 의미를 되새겨 보자구요.
"김산향교, 직지사, 지례장터, 구성 마산리, 지례면 도곡리, 부항 장자동, 그리고 부항면 대야리 홍심동까지....."
(허위선생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 난지도 벌써 75년이나 흘렀습니다. 세월은 오늘도 흐르고 역사는 차곡차곡 쌓여 갑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의병이나 독립군을 비하하는 모리배들이 더러 있습니다. 원통하고도 숨이 막힐 일이지요.
제가 학문이 짧고 졸필이라 허위선생의 큰 업적과 의로운 정신을 여기에 세세히 적지 못함이 아쉬울 뿐입니다.
끝으로 나라를 위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희생까지도 감수하신 왕산 허위선생의 영전에 큰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의병과 독립군의 후손들에게 공로에 따른 합당한 예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민족과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있으니까요.
참고문헌:
1,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
2, 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3,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안내책자
5, 매일신문 기사...등 등
-참여자치 김천시민연대 문홍연 회원 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