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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

김천 촛불 1000회, 진정 누구를 위한 투쟁이었나?

김천시민일보 기자 입력 2025.08.04 18:21 수정 2025.08.04 18:25

-소수의 이상주의적 투쟁에 놀아난 끝에 지역만 황폐화된 비극의 기록.
-'전자파 괴담'을 퍼뜨리며 시민들의 불안을 증폭시켰고, 과학적 근거보다는 감정적 선동에 의존.
-정부의 과학적 검증 결과를 '권력의 속임수'로 치부하며, 합리적 논의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
-‘투쟁만이 답’이라는 낡은 논리로 주민들을 고립시켰고, 그들이 외치던 ‘평화’는 결국 허황된 구호로 남아.

2025년 8월 9일, 김천역 광장에서 ‘사드 배치 반대 김천 촛불집회’ 1000회 행사가 열린다는 홍보물은 우리에게 씁쓸한 질문을 던진다. 

 

이 1000회라는 숫자는 과연 김천 시민의 승리였는가, 아니면 소수의 이상주의적 투쟁에 놀아난 끝에 지역만 황폐화된 비극의 기록이었는가. 

 

이제는 감상적 수사들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그 실체를 들여다볼 때다.

 

2016년, 사드 배치 발표 이후 김천은 분노와 혼란에 휩싸였다. 

 

당시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노의 파도를 탄 일부 투쟁 세력은 투쟁의 방향을 현실적인 해법이 아닌,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무조건적 철회’라는 목표로 이끌었다. 

 

그들은 '전자파 괴담'을 퍼뜨리며 시민들의 불안을 증폭시켰고, 과학적 근거보다는 감정적 선동에 의존했다. 정부의 과학적 검증 결과를 '권력의 속임수'로 치부하며, 합리적 논의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1000회라는 긴 투쟁의 시간 동안 사드 배치는 현실이 되었고, 김천 주민들은 이성적인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정부의 지원과 보상마저 제대로 받지 못했다. 

 

사드 배치 반대를 주도했던 일부 세력은 ‘투쟁만이 답’이라는 낡은 논리로 주민들을 고립시켰고, 그들이 외치던 ‘평화’는 결국 허황된 구호로 남았다. 

 

지역의 발전과 시민들의 실질적 피해 보상이라는 현실적 이익은 ‘순수한 투쟁’이라는 미명 아래 외면당했다.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운동이, 정작 그 지역민들에게 막대한 사회적, 경제적 피해를 안겼다는 점이다. 

 

긴 투쟁 과정에서 지역 사회는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겪었고, ‘투쟁’으로 인해 지역 이미지는 훼손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성과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잃은 것만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을 이끌었던 이들의 행보는 더욱 실망스럽다. 

 

한때 ‘환경운동가’를 자처하며 SRF(고형폐기물 연료) 사용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더니, 돌연 입장을 바꿔 SRF 연료 변경을 찬성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소식은 그의 신념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환경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철새 같은 행태는 투쟁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한다.

 

또한, 사드 투쟁 당시 핵심 역할을 맡다가 성추문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인물이 최근 감천댐 사업 반대 운동에 다시 등장했다는 소식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스스로 운동에서 이탈했던 인물이, 아무런 반성 없이 또다시 새로운 지역 현안에 뛰어들어 선동을 주도하려는 것은 명백한 위선이다.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 이들이, 다시금 ‘정의’와 ‘투쟁’의 깃발을 들고 지역민들을 선동하는 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진정한 평화와 지역의 발전은 비현실적인 투쟁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과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이뤄진다. 1000회 집회는 그간의 '실패한 투쟁'을 성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일부 세력의 개인적 영달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 김천 시민들의 삶이 희생되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 

 

그들이 외치는 '평화'가 진정으로 김천 시민을 위한 것이라면, 이제는 과거의 깃발을 내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보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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